대관령 국민의 숲길 지나 노동계곡에서 잠들다

대관령 국민의 숲길 지나 노동계곡에서 잠들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때 경험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돌아온다.’

‘대관령 국민의 숲길’을 찾아가는 동안, 다비드 드 브르통의 말을 떠올렸다. 프랑스 출신의 사회학자인 그는 <걷기예찬>을 통해 수많은 독자들을 걷는 즐거움에로 초대했더랬다.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 ‘두루누비’에 들어가 보면 전 국토에 걸쳐 1,875개의 걷기길이 존재한다. 길들은 구간에 따라 겹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는데, ‘대관령 국민의 숲길’도 바우길 구간과 일부 겹치고 갈라지며 강릉, 평창에 걸쳐 있다. 총 길이 10킬로미터, 대관령 신재생에너지전시관 > 능경봉입구 > 대관령 양떼목장 > 평창 횡계3리 복지회관을 순환하는 코스로 어느 지점에서 출발하든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영화 <아가씨>에서 숙희(김태리 역)와 히데코(김민희)가 산책하던 오솔길은 어디쯤이었을까?

‘대관령 국민의 숲길’ 중 ‘국민의 숲 산림트레킹 코스’를 걷기로 했다. 국민의 숲길엔 속하지만, 바우길과는 겹치지 않는 구간이다. ‘횡계3리 등산 트레킹 코스’라는 별칭도 있는데, 국립축산과학원 가금연구소 건너편에서 시작된다. 화장실과 10여대 차량을 세울 수 있는 주차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서 출발지로 적당했다. 안내도를 먼저 훑어보았다. 총 길이 3.8킬로미터로 2시간이면 여유 있게 걸을 수 있겠구나!

숲으로 들어섰다. 전나무, 독일가문비나무, 낙엽송, 자작나무, 주목나무가 자라는데, 빼곡한 전나무 숲이 먼저 황톳빛 흙길을 깔고서 반겼다.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숲의 향취, 몸의 모공이 활짝 열리고 피톤치드가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든다. 러시아 생화학자가 처음 사용한 용어, 피톤치드(Phytoncide)는 나무가 박테리아나 세균을 퇴치하기 위해 내뿜는 살균물질이다. 심리적 안정감, 말초혈관 단련, 기관지 천식, 심장 강화에 좋다고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일부 과학자는 다른 주장을 하기도 한다. 건강에 좋은 이유가 피톤치드 때문이 아니라 공해, 소음이 없는 숲의 환경 때문이라고. 그 어느 쪽이라도 좋다. 숲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만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삼림욕에 가장 좋은 시간은 하루 중 오전, 일사량이 많고 온도와 습도가 높은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다.

대관령 국민의 숲은 야생 숲이 아니다. 한국전쟁 중 갖은 포화로 산들은 불에 탔고, 나무를 보기 힘든 민둥산으로 변했다. 강원도 주민과 학생들이 벌거벗은 산에 묘목을 심었고, 반세기가 지나 그 나무들이 울창한 숲으로 자랐다. 이 숲의 기원을 알면 걷는 내내 감동에 젖지 않을 수 없다.

전나무 숲을 지나 낙엽송 조림지에 다다랐다. 빼곡한 나무 그늘 아래서 잠깐 쉬어 가기로 했다. 벤치에 앉은 채 두 발을 내려다본다. 도시생활을 하면서 두 발의 용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프랑스 인류학자 앙드레 르루아 구랑은 ‘인간이라는 종은 두 개의 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지만, 자동차, 전철, 에스컬레이터, 무빙워크 등등 현대기술문명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라는 종을 만들어낸 두 발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한다. 한편 그런 상황과 반대로 ‘걷기길’이 불어나는 건 아이러니처럼 여겨진다.

인간은 누구나 걷고 싶어 한다. 다만 고층빌딩, 정신을 어지럽히는 광고판과 간판들, 밀집한 군중, 콘크리트 바닥으로부터 벗어나 한가로이 걷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 ‘국민의 숲길’은 최고의 도피처다. 도시생활이 안긴 불안, 초조, 긴장, 근심은 오솔길을 걷는 동안 숲의 향취에 녹아 사라지고 새로운 삶의 활력이 솟는다. 그래서 다비드 드 브르통은 걷기에서 돌아올 땐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 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대관령 국민의 숲길에서 내려와 ‘계방산오토캠핑장’으로 향했다. 숲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숲에서 잠을 자는 것처럼 우리를 평화로 이끄는 게 있을까? 물론 숲이 좋다고 해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모두가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도시인들은 숲속에 ‘세상에서 가장 얇은 집’을 짓고, 하루 혹은 며칠간을 보내는 ‘대안’을 마련했다. ‘텐트’와 ‘캠핑장’이다.

계방산오토캠핑장은 용평면 노동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금강모치, 둑중개, 진강도래, 옆새우가 살 수 있을 정도로 깊고 물 맑은 계곡인데, 이곳을 찾은 이유는 무엇보다 이름 때문이었다. 중고교시절 친구들은 내 이름 앞 두 글자만 떼서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 “어이, 노동!” 머리가 굵어지면서 뒤에 한 글자가 더 붙었다. 술 안 마셔본 친구로 하여금 술맛을 알게 하고, 외박 한번 안 해본 친구로 하여금 밤새워 노는 재미를 알게 하고, 그리하여 붙은 글자는 악(惡). “어이, 노동악 오늘도 마시냐?” 아무튼 노동계곡이란 이름을 접하자 그 시절이 자연스레 떠올랐고, 회귀본능을 가진 물고기처럼 계곡을 거슬러 올랐다, 안주로 할 송어회를 챙겨들고서.

부산이 고향이라 해산물엔 익숙하지만, 경남 지방에서 자란 이에게 송어는 익숙한 물고기는 아니다. 주로 경상남도 이북에서 자라는 냉수성 어종이기 때문이다. 송어가 내 안으로 ‘첨벙’ 뛰어 들어온 건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였다. 젊은 날의 브래드 피트가 몬태나 주의 강에서 플라이낚시로 무지개송어를 낚는 장면은 정말 황홀했지! 1992년이었고, 그로부터 몇 년 후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을 만났다. <미국의 송어낚시>. 1960년대 히피들이 성경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녔던 작품으로 주인공은 무지개송어를 낚기 위해 미국의 하천을 떠돈다. 소설 속에서 송어는 펜촉이 되기도 하고, 사람처럼 말을 하기도 한다. 작가는 작중인물을 통해 하천이 오염된 기계문명사회를, 아메리칸 드림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자 더욱 궁금해졌다. 대체 무지개송어의 맛은 어떨까? 물고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인간이니 어쩌겠는가!

계방산오토캠핑장은 평창군에서 만들고 마을이 위탁 받아 운영하는데, 오토캠핑사이트 42개면, 평상(야영데크) 사이트 45개면, 카라반 15개면, 캐빈 2개, 통나무집 2개, 방갈로 2개가 온라인으로 예약가능하다. 그리고 현장 접수용 평상사이트가 12개 더 있다. 자리가 많아서 여름 성수기 아니면 사이트가 다 차는 일은 드물다. 먼저 오토캠핑사이트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카라반을 주차하고, 텐트를 치고, 요리를 하고, 아이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고, 노인들은 산책을 하고. 캠퍼의 연령대는 다양했고 주차된 차들도 1억 원을 호가하는 전기차까지 다양했다. 도시인들은 편한 집이나 숙소에서 묵는 대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왜 캠핑을 하는 것일까? 나는 캠핑장에서 ‘행복의 원형’을 본다. 세상에서 가장 얇은 집, 자연, 음식.

오토캠핑장도 빈자리가 있었지만, 나는 F구역의 평상사이트를 선택했다.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텐트 한 동만 있는 공간은 한적했고, 무엇보다 계곡이 바로 앞에 있어서 좋았다. 텐트를 치고, 캠핑의자를 펼치고, 송어회를 입에 넣었다. 숲의 냄새,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저물어 가는 저녁. 마지막 송어회 한 점을 입안에 넣었을 때, 달이 떴다. 문득 이백의 시가 떠올랐다. <월하독작月下獨酌]>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
벗도 없이 홀로 마신다
잔 들어 밝은 달 맞이하니
그림자 비쳐 셋이 되었네

계방산에서 내려온 물들이 모여 노동계곡을 흐르고, 물소리에 취한 나는 가을의 초입으로 떠내려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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